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개화파의 평화적인 개혁, 한계에 다다르다
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8)
1. 개화파가 부딪친 장벽, 청,일과 손잡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노리는 조선의 수구파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교체하기 위한 부르주아 개혁이 순조로울 수는 없다. 서양에서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기도 전에 서양 열강의 수탈을 당해야 하는 조건에서 외세와 결탁한 수구파의 반대와 탄압은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였다. 처음에는 수구파들은 근대화를 그저 신식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개화파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나타내고 그들의 지향이 봉건제도의 청산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개화파를 정치적으로 매장해버리려고 하였다. 봉건제도의 청산은 자신들의 독점적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들어온 3000여 명의 군대를 조선에 계속 주둔시키며 민비 척족을 비롯한 수구파와 야합하면서 조선의 내정간섭을 거리낌없이 자행하고, 개화파의 진보적인 개혁을 사사건건 방해해 나섰다. 일본 역시 겉으로는 개화파를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본심은 청나라에 견줄만한 친일세력을 구축하고, 조선에 침략적 지반을 닦으려는 저의였으므로 <자주>와 <근대화>의 방향이 분명한 개화파를 지지할 리 없었다.
개화파의 활동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개혁자금을 마련하는 문제였다. 나라의 근대화란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사업이므로 김옥균은 박상인, 남정철과 같은 서울과 지방의 큰 상인, 기업가들과 연계하여 자금문제를 풀어보려고 하였으나 신흥자본가들의 취약성으로 성과가 없었다. 김옥균은 결국 외국에서 차관을 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당시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고 있던 상태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심중한 문제였다. 나라의 식민지적 예속을 더욱 심화시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3년 10월 11일부 ≪한성순보≫에서 김옥균이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얻어서 내정을 혁신코저 함은 임시방편으로는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으나, 이집트 같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어찌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을 것이랴!’고 말한 것을 보면 이에 관하여 모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근대화 자금마련을 위한 차관도입의 실패
개화파가 외채 구입을 결심하게 된 것은 친일세력을 조선에 부식시키기 위해 은근히 추파를 던지는 일본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로는 환심을 사면서도 돌아서서 개화파의 활동을 방해하는 일본의 표리부동한 행위는 개화파에게 있어서 더 큰 위험으로 되었다. 김옥균은 임오군란 직후 제2차 일본 방문에서, 고금리의 비싼 차관인 17만 원을 받으면서 일본 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300만 원의 차관이 가능한지 타진해보았다. 이때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는 고종의 위임장만 가져오면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당시 조선의 재정은 최악이었으며 민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 집권세력은 독일인 재정고문 묄렌돌프의 조언이 따라 당오전 발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2차 방일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김옥균은 악화의 주조로는 재정난을 타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가고를 가중시켜 백성의 생활에 큰 해독을 주게 된다면서 국가의 근대적 화폐기관 <전환국>을 설치하고 우선은 차관도입을 하자고 주장하였다. 고종은 양쪽 손을 다 들어주어 당오전의 주조령을 내리고 김옥균에게도 300만원 국채모집의 위임장을 부여한다.
김옥균은 300만 원의 차관을 얻기 위한 3차 방일을 준비하면서 1883년 3월 김옥균은 『동남제도 개척사 겸 포경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울릉도, 제주도 지역에 일인들이 난입하여 벌목과 불법 어로가 빈번했고, 17세기 말 이후 서양 열강은 기름을 얻기 위하여 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조선 해안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김옥균은 이를 활용해 재정사업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즉 외국인의 투자로 개발하거나, 그를 담보로 거액의 외채를 모집할 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이 차관을 제공할 때 담보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때를 대비해서 담보로 울릉도의 산림 채벌권이나 포경권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고종에게 이러한 실정을 상주하였고, 고종은 차관 교섭권을 보강해주기 위해서 이런 이상한 관직을 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1883년 6월 차관교섭을 위하여 세 번째로 일본에 건너갔지만, 이노우에는 김옥균이 내놓은 옥쇄가 찍힌 위임장이 위조라면서 차관 지급을 거절한다. 갑자기 이노우에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수구파 민비 일당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민비 집권세력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심어놓은 독일인 재정고문 묄렌돌프를 시켜 일본공사 다께조에를 통하여 김옥균이 가지고 간 위임장은 위조이며, 이를 일본 정부에 보고하도록 모략을 꾸몄다. 그런데 이노우에의 태도 돌변에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노우에는 위임장이 진짜임을 알고 있었지만, 거짓 보고를 핑계로 차관제공을 거부한다. 당시 군비지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일본의 재정 형편으로서는 개화파에게 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돌릴 여유가 없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조선의 근대화를 달가워할 리 없는 일본 정부가 차관제공을 공식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차관교섭에 실패하자 김옥균은 조선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미국무역상사의 모오스 사장을 통하여 미국과의 차관교섭을 추진한다. 푸트 공사나 주일 미국공사는 처음에는 김옥균의 제안에 호의적이었으며 모오스는 차관교섭을 위해 뉴욕까지 다녀왔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를 막으려는 미국도 결국 이를 거부한다. 김옥균은 그 뒤 일본 제일 은행과 교섭하여 20만 원의 대부를 얻어보려고 하였으나 일본 여야 정치세력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3. 외세와 민비 수구파는 개화파의 활동에 어떤 식으로 제동을 걸었을까?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고 제물포 조약으로 인천항 개항까지 성공하였으나 청나라와 비교해 조선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없었다. (일본은 이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890년대 중반에도 조선 정부 내에 친일인사를 심기가 수월치 않았다) 일본은 1884년 3월에 청나라 정부 내에서 궁중 정변이 일어나고 대원군의 귀국설이 떠돌자 수구파에게 접근하기 시작하고, 수구파들은 ‘만일 대원군이 귀국할 경우 일본이 민비를 보호하고 대원군의 집권을 막아달라’는 망발을 서슴치 않았다.
전영사 한규직은 일본공사관 서기관 시마무라에게 ‘우리 조선을 귀국에게 위탁하여 귀국 정부가....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한다면 모든 지휘를 받들겠다. 만일 대원군이 귀국할 때에는 호위명 2000∽3000명을 감국대사와 함께 파견해 줄 것을 기대한다.’≪근대일선관계의 연구≫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수구파의 ‘대원군 재집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시마무라는 한규직에게 일본 왕에게 고종의 친서와 사신을 보내라고 권고하였으며, 이에 수구파는 1884년 5월 상순, 민응식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음모는 청나라에서 대원군을 돌려보내지 않기로 하자 좌절되었으나, 수구파와 일본의 결탁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청나라도 조선의 자주권과 개화파의 개혁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면서 조선에서의 사회발전을 극히 저해하는 주적이었다. 당시 청국이 조선의 독립을 얼마나 노골적으로 침해했는지 사례를 보면 임오군란 직후 체결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전문에 조선을 청국의 속방(屬邦)이라고 써놓았다. 청국조정은 조선에 대해 “무릇 외우(外憂)에 관한 일은 일체를 청국에 문의하라.”고 지시했고, 청나라 제독 오장경은 고종에게 맞대놓고, “내가 3000 군대를 거느리고.... 매사에 황조(청국)을 배반해서는 안된다”고 협박하였다.
또 당시 발생한 주전(鑄錢)문제는 당시 청나라와 결탁한 수구파가 개혁을 어떻게 방해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개화파는 조선의 재정위기가 심각해지자, 무질서한 주전제도를 철폐하고 국가의 공식 화폐주조기관인 <전환국>을 설치한다. 그러나 이 <전환국>도 민태호 민영목 민응식 등 민가 일당의 치부수단으로 변질되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청나라 오장경과 수구파는 결탁하여 당오전 당십전의 주조계획을 세우고 조선의 정상적인 화폐 발행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고 국가의 재정위기 해결능력을 더욱 실추시킨다.
그들의 만행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1884년 1월 청나라 침략군이 서울 광통교 부근의 한 약국을 습격하고, 약품을 빼앗으려다가 약국 주인의 아들을 사살하고 그 아버지에게도 총을 쏘아 중상을 입히는 일이 발생했다. ≪한성순보≫가 이 사실을 보도하자 청군은 ≪한성순보≫를 발행하는 통리기무아문의 박문국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민비 수구파 정권은 청군의 이러한 만행에 대하여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한성순보≫의 편집내용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제독 오장경은 개화파의 개혁 운동에 위구심을 가지고, 조선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의 경계태세를 강화했고, 민영익 일당을 사촉하여 궁중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제 신식대포 2문까지도 수리 명목으로 압수해버렸다. 또 청나라는 노골적으로 조선의 외교와 재정권을 간섭하여 조선의 국정을 흔들면서 자주와 근대화에 대한 역행의 흐름을 조성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수구파는 개화파의 활동으로 어렵게 마련된 성과들을 가로챘을 뿐 아니라 개화파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고 박해했다. 개화파의 활동으로 창설된 내아문, 외아문을 비롯한 새로운 국가기관의 요직에는 수구파가 틀고 앉았으며 전환국을 비롯하여 중요 부분의 직책도 민태호를 비롯한 수구파 거두들이 차지하였다. 이것은 그대로 새로운 국가기관들이 근대적 국가기관으로서의 자기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수구파는 개화파를 정부의 요직에서 한직으로 좌천시키거나 중앙관직에서 지방관직으로 밀어내는 방법으로 개화파의 집결을 방해하였다. 박영효도 같은 달 광주유수로 좌천되었다. 개화파인 윤웅렬이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내려간 것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해방총독(해안 방비 총독) 신복모도 철직되었으며, 개화파가 광주에서 양성한 신식 군대 1000명은 수구파의 거두 윤태준과 한규직 휘하의 친군영의 전영과 후영에 편입시켜 버렸다. 1883년 6월에는 개화파 요인들인 홍영식, 서광범, 변수 등이 미국으로 파견되는 전권대신 민영익이 수원으로 떠남으로써, 정계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수구파의 이러한 책동은 개화파 요인들을 지방 또는 외국으로 축출하여 개화파 세력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개혁사업을 저지시키려는데 있었다.
개혁을 파탄시키기위한 수구파의 책동은 1884년 봄 이후 극도에 이르러, 개화파의 핵심인 김옥균에 대한 살해를 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묄렌돌프는 김옥균과 주전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패배하자, 수구파에게 “조선에서 없애야 할 해독은 당오전이 아니라 김옥균이니 우선 그를 제거해야 한다, 김옥균이 백방으로 여러분(수구파)를 모해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단결하여 이 나라의 제일가는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옥균전≫ 에이오출판사 1944년)면서 김옥균을 제거하도록 사촉하였다. 이것은 김옥균을 정치적 적수로 간주한 세력들의 일맥상통한 입장이었다. 당시 미국에 전권대신으로 갔다가 귀국한 민영익도 김옥균을 유일한 정치적 적수로 간주하고 그를 해칠 흉심을 품고 민태고, 민영목과 결탁하여 기회를 노렸으며 청나라도 민가일당과 야합하여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살을 기도하고 있었다.
4. 개화파의 근대화 전략의 수정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평화적 방법에 의한 개혁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응책으로만 조성된 난관을 타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개혁운동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미 김옥균은 일본의 배신으로 300만 원 차관교섭이 실패하였을 때, 자기의 비장한 결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자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지금 빈손으로 귀국하면 집권 사대당은 나를 비판하며 궁지에 몰아넣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어쨌든 우리 개화당은 심히 타격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개혁안도 없어질 것이며 조선은 청나라의 영구적 속국이 될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우리 당과 사대 당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후꾸자와 유끼지전≫
점차 사태발전의 심각성을 느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반동적 수구파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않고서는 나라의 자주적 진보도 부국강병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수구파 정권을 타도하고 개화파 자신이 정권을 잡은 길만이 사회의 근대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개화파의 이러한 정치적 견해와 각오에 대하여 홍영식은 “근래에 와서 국세가 위급하여 차마 앉아서 국가의 멸망을 기다릴 수는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시급히 극단적인 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 국세의 위급을 말할진 데 오늘 우리 국가를 위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정부이다” ≪조선교섭자료 상≫ 홍영식의 이 말은 당시의 위급한 우리나라의 내외 사정과 함께 개화파가 단순히 자기의 정치적 존재의 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극단한 방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그 책임이 전적으로 부패무능한 수구파 정부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갑신정변 전 김옥균은 개화파의 행동 방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들은 수년내로 평화적 수단으로 고생을 이겨내면서 모든 힘을 다하여 왔으나 그 성과는 없을 뿐 아니라 오늘은 이미 죽을 지경에까지 빠지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적수를 눌러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의 결심에는 한길이 있을 뿐이다”≪사변 전 가께조에 공사의 보고 및 훈령≫ 김옥균이 강조한 최후의 선택, 우리의 결심이란 곧 평화적 방법이 아니라 폭력적 방법으로 수구파 반동세력을 타도하기 위한 대담한 개혁방법으로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의 새로운 발전을 의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