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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다양한 근대화를 위한 노력

주권자전국회의 2023. 1. 4. 11:40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7)

 

1. 개혁적인 정권기관의 설치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군에게 납치되고 민씨 일족이 다시 집권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개화파들은 국가정치기구의 설립을 서둘렀다. ≪통리기무아문≫은 대원군이 잠시 집권하자마자 바로 해산시켜 버린바, 수구 정권이 안정되기 전에 개혁을 추진할 기구부터 서둘러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882년 7월 25일 새로운 국가기구인 ≪기무처≫가 경복궁 내에 설치된다. ≪기무처≫의 성원 7명 중 5명이 개화파로 협의제 기관이면서도 개혁에 관한 사안을 개화파의 의도대로 결정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기무처≫는 개혁과제를 마련하는 임시기구였으며 5개월 후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병하였지만, 1894년 갑오개혁의 지휘부인 ≪국군기무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 것을 보면 당시 ≪기무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조선 정부는 1882년 11월 17일 ≪통리아문(일명 외무아문)≫을 결성하였으며 11월 18일에는 ≪통리내무아문≫을 설치하였다. 통리아문은 대외사업을 전담하고 통리내무아문은 국내정치와 군사를 처리하는 기관이었다. 통리내무아문을 창설하면서 국왕이 “편민리국(백성들에게 편리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과 관계되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토의 결정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국왕의 독단적 결정보다는 집체적인 토론이 가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12월 4일에는 통리내무아문을 ≪통리군국사무아문≫으로 통리아문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고치고 12월 22일 삼군부와 기무처를 폐지하여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흡수한다. 이렇게 되어 국내의 정치・군사・행정기관을 통리군국사무아문이 통일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체계가 세워졌다, 

 

2. 국가기구의 합리적 재조정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들은 국가기구의 간소화를 위하여 감생청을 설치 운영하였다. 이 감생청 사업에 대한 총 책임은 어윤중이 맡았고, 실무담당 책임은 유홍기가 맡았다. 어윤중은 1882년 12월 29일 감생청을 통하여 20여 개 항목의 국가기구 간소화 안을 제기하였다. 개혁안은 국가기구 개편의 기본 방향에 대한 것으로서 왕권을 정점으로, 층층이 복잡하게 편성된 기구들을 간소화하며 불합리한 기관들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이었다. 

 

개혁안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국왕의 10촌이 넘는 사람은 ‘종정경’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또 70살 이상의 의정부 당상관들을 모두 축소한다는 것, 공신들의 둔토를 호조에 넘기며 충훈부의 비용은 모두 충익위 (공신들의 자손들이 속해있던 군사관청)경비에서 담당하여, 어용 상인들의 개별적인 물품 상납을 폐지하자고 하였다. 또 유명무실한 군사행정기관 5위 도총부와 국왕의 호위기관인 호위청, 왕실의 사치를 보장하는 사도시 내섬시, 내자시, 사재감, 의영고, 장원서, 사포서 등을 모두 폐지하자고 하였다. 비대해진 중앙관청들을 폐지 통합함으로써 국가경비를 절약하고 왕실의 무절제한 생활을 제약하겠다는 시도였다. 또 독립적 중앙관청이던 와서(기와 굽는 관청)와 조지서(종이 만드는 관청)를 공조에 소속시키고 혜민서, 활인서들은 전의감에 소속시키자고 제의했다. 또 문관.음관.무관의 차별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할 것, 지방특산물의 진상을 줄이거나 없애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개혁안들은 수구파의 완고한 반발로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생청의 발기로 정부는 1882년 12월 각급 관청들의 모든 회계장부에 대한 검열사업을 진행하였으며, 규정 이외의 세금과 공납을 제멋대로 받아들이는 불법 행위가 금지되었다. 감생청의 설치와 활동은 극도로 문란해진 착취제도를 재정비하면서 동시에 무질서한 약탈을 제한하여 근대적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노력이었다. 

 

3. 군대양성과 무기제작

 

임오군란 이후 수구파는 청나라와 결탁하여 청과 결탁한 정권을 보호하는 반혁명적 무력을 강화한다. 서울에 주둔하던 청군 제독 오장명의 명을 받은 원세개는 조선군대에 1000명으로 구성된 친군영을 조직하고, 청나라식 훈련을 시작하였다. 친군영은 청동 총포 10문과 1000여 정의 영국식 신식무기로 장비하였다. 이러한 반혁명적 군대는 언제든지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탄압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강화시켜, 개화파들은 자체의 무장을 갖추는데 정성을 쏟았다. 

박영효가(갑신정변 이후 친일 주구로 전락) 1882년 12월 한성판윤이 되자 한성부에서 청년들을 모집하여 신식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수구파의 저항에 부딪쳐, 1883년 3월 박영효는 광주유수로 좌천된다. 그러나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고 병권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개화파는 국왕에게 신식 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국왕의 승인을 받아 임오군란 때에 해산당한 군인들과 지방 청년들을 모집하여 약 1000명으로 편성된 특별군영을 조직한다. 개화파는 일본사관학교에 파견한 10여 명의 유학생을 소환하여 훈련을 담당하게 하고, 일본사관학교 출신 신복모를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 기기창 번사창-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 내에 있다.

1883년 12월 1일부 ≪한성순보≫에는 광주에서 500명의 군대가 한 열병 훈련이 모든 면에서 결코 다른 나라의 군대에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당시 군대의 근대적 개혁사업이 거둔 적지 않은 성과를 알 수 있다. 또 개화파는 1883년 4월 서울 삼청동 북창에 기기창을 설치하고 신식무기 제작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후 군국아문은 무기제조와 기계 공업의 발전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1883년 5월 23일 기기국을 창설하였고, 박정양 김윤식, 윤태준, 이조연을 총판으로 임명하였다. 

 

4. 경찰 개혁  

 

계급사회에서 경찰은 민중들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사실은 매 사회의 계급적 지배질서를 안정화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의 ‘포도청’도 마찬가지였다. 도적이 횡행하고 치안사태가 악화를 막는다고 하였지만, 이는 양반들 중심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며 이들의 가혹한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체제를 이탈한 도적들을 가두는 봉건체제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양반과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며 백성들을 탄압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포도청이 새로운 시대의 자본가, 상인을 비롯한 시민계급의 이익을 옹호할 수는 없었다.

 

개화파들의 통찰력은 이를 꿰뚫어 보고 근대사회에 맞는 경찰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차에 박영효가 한성판윤이 되자 근대적인 경찰기구로서 ‘순경부’를 창립하기로 한다. 1883년 1월 23일 통리군국사무아문에서 한성부에 순경부를 설치할 결정이 이루어졌지만, 박영효가 곧 한성판윤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를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근대적 경찰제도를 세우기 위한 개화파의 활동은 그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1884년 7월 개화파였던 남원 유학 오감이 ≪론재판경찰법≫이란 책을 만들어 국왕에게 제출했다. 이 책은 근대적 경찰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내용으로, 낡은 경찰기관인 포도청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설득렸있게 논증하고 ‘... 경찰이란 순사를 말하는 것인데 그것은 민간에서 규율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실속있게 수행하도록 애써 노력하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또 다른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경찰제도의 내용을 연구분석하여 우리나라에 필요한 경찰세칙을 만들어서 첨부했다. 개화파들에 의한 경찰제도의 개혁사업은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경찰제도의 개혁 방향을 명백히 밝혀 우리나라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추진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근대적 상업 지원 활동  

 

18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객주들의 조직인 상회가 조직되어 일정한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김옥균은 그가 쓴 ≪회사설≫에서 ‘우리나라에서 상업이 출현한 이후 지금까지 4000년이나 되었다고 보나, 한 사람이 홀로 팔고 홀로 바꾸는 경영방법만 알았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의하고 운영하는 방식을 모르고 있다.’면서 ‘상사사업’은 시일을 다투는 급선무라며 ‘정부에서 해당사업을 장려하여 줌으로써 나날이 발전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한성순보≫. 이러한 개화파들의 활동에 힘입어 1882년 9월 22일 유학 고영문은 ≪상회소와 국립은행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다. 

조선 정부는 상업의 발전을 이룩하고 또 상업 수세를 원할히 거두려는 목적에서 상업조직에 대한 보호 장려정책을 실시하였다. 1883년 6월 평안도 사람들이 대동상회를 창설되었는데 외아문에서 보호하기로 하였고,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장통상회를 조직하였을 때에도 내아문에서 보호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밖에 권연국(담배제조기업체), 양춘국(술간장된장생산기업체), 두병국(두부떡을 비롯한 식료업체) 등 기업체들이 창설되었다.

 

6. 통신 개혁 

 

조선시대의 통신은 봉수와 역마제도가 기본으로,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시대의 흐름에 매우 뒤떨어진 낡은 것이다. 통신은 사회발전에 걸맞게 발전시켜야 할 필수조항이지만, 당시 서울과 각 개항장들에서 서양 열강들이 통신부문의 이권을 쟁탈하기에 혈안이 되고 있던 상황에 비추어 우리 자체적인 통신 개발이 더 절박한 개혁과제였다. 또 열강들이 자체적으로 이용하는 통신 시설과 대비해볼 때 조선의 낡은 통신체계를 그대로 둔 채 자주적인 근대화를 꿈꾸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우편제도를 근대화 사업은 개화파의 핵심 홍영식이 담당하였다. 홍영식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한 기관인 우정사의 협판으로 임명되어 우편제도를 근대화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1883년 6월 미국을 시찰하는 보빙사의 부사로 임명되어 미국의 전신제도를 세심히 조사연구하고 돌아왔다. 그는 11월 21일 국왕에게 미국방문 귀환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체신제도를 근대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제기하여 승낙을 받았다. 1884년 3월 26일 조선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통신기관인 우정총국이 설립을 보게 되었으며 총판으로 홍영식이 임명되었다. 홍영식은 1884년 우정총국 신설과 관련하여 ≪개략장정≫, 우정총국 운영규칙과 세신사업과 관련한 각종 규칙과 세칙 등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84년 10월1일 조선은 현대적인 체신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7. 도로 건설 

 

김옥균은 ≪치도략론≫에서 우리나라의 부강지책은 치도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운수가 불편하면 강 건너의 곡식을 강 안으로 옮길 수 없다. 이것이 길을 잘 닦는 문제가 급선무로 되는 까닭이다. 도로가 닦아지면 10명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으며 나머지 9명의 힘을 다른 수공업에 돌릴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전에 놀고먹던 자들이 각자 직업을 얻어 백성들도 편리하고, 나라에도 이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한성순보≫. 1883년 2월 한성부에 치도국(도로건설 및 관리기관)을 설치하고 수구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 종로 거리에서 동대문까지의 도로정리 및 확장공사를 진행하였다. 이 사업도 민비 일족의 모략으로 얼마 가지 못해 중단되었으나 개화파들의 근대적 개혁활동의 일환이었다.

 

8. 인재 양성 

 

국정개혁 단행을 앞둔 개화파에게 인재의 양성은 매우 절박했다. 임오군란 이후인 1883년 3월 개화파는 청년 60명을 일본에 유학시켰으며 7월에는 17명을 일본에 유학시켰다. 이 유학생들은 일본 육군 도야마 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지식, 기술을 수학하거나, 전문학교에서 정치, 경찰, 우편, 관제, 재정 제도 관련 실무지식을 배웠다. 학비는 개화파의 노력으로 국가에서 부담하였는데, 국가가 자금난에 처한 조건에서 김옥균이 일본에서 차관교섭 끝에 받은 17만 원의 차관 중에서 적지 않은 몫을 유학생들의 학비에 충당하도록 하도록 하였다. 당시 유학생 신중모의 발언을 보자. “나는 본시 상사람인데 유길준의 권고로 일본에 가서 어학을 배웠다. 당시 건너간 20여 명 중에서 나와 14명은 사관학교에서 1년 반 정도 공부하였는데, 김옥균이 일본에 왔을 때 7일마다 한 번씩 모여 만났다. 그는 ‘서양 각국은 모두 다 독립 국가들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독립한 연후에야 다른 나라와 화친할 수도 있는데..... 조선은 어느 때에나... 서양 여러 나라와 같은 대열에 서게 되겠는지…’라고 말했다.” ≪대역부도죄인 이희정 등 국안≫. 개화파의 인재 양성 목적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진술이다. 

 

이외에도 개화파들은 서울 전농동에 근대적인 농목장과 농사시험장을 설립하고 새로운 농업경영방식과 농업과학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농업학교 창설 준비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일찍이 외국에 파견되어 양잠업과 영어를 배우고 돌아온 농업학교 출신 서재창이 담당하였다. 

 

9. 신문의 발간 

 

개화파는 부르주아 계몽사업에서 신문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김옥균이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때 인쇄기계를 구입하면서 6명의 인쇄 기술자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1883년 3월 20일 근대적 출판기관인 박문국을 창설, 10월 1일부터 ≪한성순보≫가 발간되었는데 순 한문 신문으로 관보의 형식으로 월 3회 발간되었다. 신문 첫 면에는 국왕의 명령과 정부의 중요결정들이 실렸고, 국내 각지의 상업 및 물가가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다. 또 개화사상가들의 근대국가 건설에 대한 정치적 견해와 부르주아 개혁에 대하여 해설한 논설들이 실렸다. 또 갑신정변 이전까지의 세계정세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자주 실었다. 

 

임오군란부터 갑신정변까지가 개화파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전천후의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게 쌓았던 개혁의 성과들은 수구세력에 의해 하나씩 좌절되고, 급기야 개화파들의 생존마저 위기에 몰리며 김옥균은 정변을 계획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