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6) - 국가정치기구의 개편: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1) 근대화를 위한 국가정치기구, ≪통리기무아문≫의 설치
조선은 ‘절대 왕정의 신분제 사회- 봉건국가’였다. 조선 시대는 언론과 기록이 투명했던 것으로 유명했지만, 모든 정책이 국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백성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정을 토의 결정하는 ≪의정부≫가 있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정부≫는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며 국왕의 결정을 집행하는 곳도 인・의・예・병・형・공의 6조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해지자 전쟁, 외교 등의 상황 대책기구로서 ≪비변사≫가 만들어져 그 역할이 점차 커지지만, 국정 전반에 걸친 정책토의기구는 아니었으며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지도 않았다. 의정부 정승과 6조의 관리들이 비변사의 중복 직함을 갖고 참여하였으며 실무를 위하여 약간의 하급관리들을 두는 것에 머물렀다. 결국 이 비변사는 각 당파들의 권력을 이합집산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봉건적 절대 왕정 사회에서 근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국가기구 내에 개혁의 준비를 위한 새로운 기구를 별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득권과 낡은 틀에 얽매이는 수구 양반들이 국가의 모든 행정기구를 장악하고 음으로 양으로 근대화를 지연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자본주의 서양 열강의 침략이 밀려오는 조건에서 수구적 관리들의 협의체였던 ≪비변사≫ 같은 조직의 관리들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낡은 봉건적 전제군주제도를 자본주의 제도로 바꾸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 기구 내에 기존에 틀이 아니라, 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정부 내 사령탑이 필요하다. 개화파들은 그를 마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고위관직에서 활동하던 김홍집, 어윤중의 제기로 1880년 12월 21일 새로운 행정관리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이 창설되었다. ≪통리기무아문≫에는 행정적 직분을 수행하는 12사를 두었다. (≪통리기무아문≫은 임오군란 시 대원군이 잠시 집권하자마자 해산시켜 버려 2년 남짓 존립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의 각 기관인 12사의 기능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새로 창설된 기관들은 외무통상 국방 군수, 기계 제작 사업들을 장악 통제하는 행정기관들이었다. ≪통리기무아문≫의 이러한 조직구성은 개항 이후 새로운 내외정세에 대처하여 조선이 민족적 자주권을 고수하고 나라의 근대화를 위한 두 가지의 사업에 착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통리기무아문≫의 창설은 국가정치기구에 대한 부르주아적 개혁의 첫걸음이었다. 이 정치기구는 종래 국왕의 자문, 또는 보좌의 역할밖에 하지 못한 ≪의정부≫나 또 주로 외교, 국방 치안 사무를 처리하던 ≪비변사≫와는 달리 국가의 중요한 대내외 정책들을 토의 결정하고 국왕의 비준을 받아 그것을 집행할 것을 각사, 각영, 8도를 비롯한 중앙과 지방의 각급 통치기관들에 명령하고 장악 통제할 권한을 가졌다. 이것은 전제 왕권과 세도 정권에 짓눌려 맥을 추지 못하던 각급 행정기관들의 기능과 역할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조치의 하나였다,
≪통리기무아문≫이 창설된 다음 날인 12월 22일에는 그 기관들의 대신들을 임명하였는데 그 내부의 역량 관계를 보면 영의정 이최응을 총리대신으로 또 민영익 등 수구파 관리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그들도 근대화를 위한 국가기구에서 활동하는 이상 개혁사업을 전면적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1881년 11월 9일 통리기무아문의 12사를 동문사, 군무사, 통상사, 전전사, 율례사, 감공사 6사로 고쳤다가 11월 21일에는 6사에 이용사를 더 설치하여 7사로 개편하는데 이때 개화파의 비중이 좀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통리기무아문≫내에서 개화파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의 중앙정치기구가 점차 근대화의 방향으로 개편되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통리기무아문≫의 활동
개화파들은 ≪통리기무아문≫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외래 자본주의 침략이 강행되고 있는 환경 속에서 국방을 강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돌렸다. 조선 시대 후반기 국방과 외교를 담당했던 ≪비변사≫는 대원군 집권 시에 해체되어, ≪삼군부≫가 신미양요까지는 그 기능을 잘 수행하였지만, 그렇다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서양의 침략에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전반적인 기계 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에서 고종의 동의가 이루어졌으며 우선 삼군부를 대처할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창설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통리기무아문≫은 국방을 근대화할 조처로서 군무사 안에 다시 총무국 참모국, 훈련국의 3개국을 설치하였다.
1881년 2월 개화파들은 ≪통리기무아문≫을 통해 총포 및 군함의 준비정형을 시찰할 목적으로 이원회를 참획관으로 하고 이동인을 참모관으로 하는 조선 정부의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형식상 시찰단으로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의 목적은 무기구입과 그와 관련되는 차관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타진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1881년 2월 20일 조선 주재 일본공사 하나부사가 외무경 이노우에 앞으로 보낸 보고서 ≪조선정부가 비밀리에 시찰원을 파견하는 것과 기채(차관) 및 포함구입의 기도를 개략적으로 내보하는 건≫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동인은 은 600냥과 호피 20장을 무기구입을 위한 교섭비로 가지고 갔다.
개화파들은 이러한 준비사업을 진행하는 한편 1881년 4월 각 영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별기군을 창설을 구상하였다. 1881년 12월 25일 ≪통리기무아문≫은 종래의 군사편제상 불합리성을 극복하고, 군사기관들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할 목적으로 훈련도감, 용호용,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 5영 군문을 폐지하고 무위영, 장어영 두 영을 설치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이 착수한 군사개혁에는 낡은 무기와 기술에 기초한 군사편제를 새로운 군사기술에 토대한 군사제도로 개편하여 실제적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개화파들의 구상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개화파들은 ≪통리기무아문≫을 통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김옥균은 ‘우리나라를 구하자면 민중을 교육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면서 근대적 과학기술을 배운 인재양성사업에 큰 의의를 부여하였다. ≪통리기무아문≫은 고종에게 청나라에 유학생과 실습생을 파견하자고 요청한 결과, 고종은 청나라의 수락을 받았고, 1881년 2월 ‘영선사’라는 대표단을 파견할 수 있었다. 영선사란 새로운 군기제조의 기술습득을 위하여 학도와 공장을 인솔하고 청나라 갔던 사신을 말한다. 김윤식을 영선사로 하여 1881년 유학생(학교) 25명, 실습생(공장) 13명, 등 69명의 대표단이 청나라 천진으로 갔다. 그들의 목적은 새로운 무기제작법과 그에 필요한 물리, 화학, 기계공학을 비롯한 근대적 과학기술의 성과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유학생은 일본에도 파견되었다. 1881년 4월 어윤중, 홍영식 일행이 ≪신사유람단≫의 명칭으로 일본에 갔을 때 어윤중은 수원으로 데리고 갔던 한 성원을 경응의숙에서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다른 성원은 동인사에 입학시켜 특히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전공하도록 하였다. 1882년 초 처음으로 일본 시찰의 길에 오른 김옥균도 일부 성원들을 교토에 떨구어 화학과 양잠업을 공부하고 육군 도야마 학교에서 신식군사교육을 받으며 피혁공장에서 실습하게 하였다.
이외에도 ≪통리기무아문≫은 일본군의 침투가 심해진 울릉도에 대한 검찰관의 파견, 해로의 요충지인 동래부 절영도에 진을 설치하는 문제,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광산의 관리문제 등 각종의 현안을 처리하여 개혁 정책 담당 기구로서의 현안을 처리하였다.
3) 외세와 수구 세력의 개화를 위한 사업 방해
개화파들이 착수한 개혁사업은 아직 부분적인 분야에서의 초보적인 성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사업은 처음부터 국내외 수구세력들의 방해 책동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것은 개화파들의 개혁 활동이 매우 복잡하고, 심각한 민족적 투쟁이며 정치투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은 민가권력집단의 사대투항주의적 대일 굴종 정책을 이용하여 정치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별기군 내에 일본 공병 소위 ‘호리모토’를 군관으로, 일본 순사 고바야시 아가지 및 일본 깡패 다께다를 침투시켜 개화파들의 군사개혁사업에 인위적인 난관을 조성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무리한 개입으로 인해 청나라의 이홍장은 개화파들이 착수한 부르주아 개혁사업을 친일운동이라고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면서 개입하기 시작했다.
민가권력은 ≪통리기무아문≫의 요직을 차지하고 개혁사업에 제동을 걸었다. 또 위정척사 운동자들과 연계를 맺고 있던 대원군은 개화파의 개혁운동을 ‘대일 굴종 정책’이라며 적대시하였다. 개화파들 앞에는 개혁사업을 가로막는 이러한 애로와 난관을 뚤고 나가야 할 어렵고 복잡한 과업이 제기되었다. 결국 임오군란에 놀란 고종이 대원군에게 통치를 일임하자마자 ≪통리기무아문≫은 해산되며,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자 청나라의 지원을 받는 민비 일족의 집권 속에서 개화파는 개혁을 다시 재개할 ≪기무처≫를 창설하게 된다.
<다음 호에 임오군란 이후 갑신정변 이전까지 개화파의 개화활동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