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본격적인 민족의 위기에서 자주권을 지키기위한 개화파의 노력

주권자전국회의 2022. 10. 20. 11:38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4) : 일본에 대한 대응편

 

1)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 부르주아 혁명사를 쓰면서 김옥균을 탁월한 혁명가로 규정한 지난번 칼럼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김옥균을 일본의 앞잡이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또 김옥균이 친일파는 아니더라도 일본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순진하고 무모한 청년개혁가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김옥균 친일파 운운’은 일본이 날조해낸 음모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친일파로 만들어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자신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할 힘이 없어 자신들을 본받아 <메이지 유신>과 같은 개혁을 하도록 도와주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자신들이 결국 조선을 근대화시켜 주고 보호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일본은 김옥균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는데 이용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김옥균이 일본 편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조선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심으로 김옥균을 도와줄 의도도 없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김옥균에게 등을 돌린다. 

 

김옥균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일본을 믿은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개혁을 위하여 청나라를 몰아내는 것이 주된 전선이었기 때문에 일본과 전술적으로 제휴할 필요를 느꼈을 뿐이다. 김옥균은 수구 양반들과 결탁되어 조선을 착취하던 청나라 일본 등의 외세를 몰아내고 근대화를 하려고 했던 것이며 당시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주적이 청나라였기 때문에 청나라를 몰아내는 데서 일본과 제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전혀 믿지 않았던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날짜 등을 일본에 다르게 알려주며 그들의 간섭과 배신을 경계하였다. 

 

나는 이 모든 내용은 이후 갑신정변 과정과 평가 등에서 다룰 예정이다. 내가 앞에서 쭉 연재했던 <제너럴셔먼호> 침략에 대한 조선의 항전 이후 미.일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투쟁사는 그나마 쓰기가 수월했던 것 같다. 반면 부르주아 혁명사는 투쟁사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간고하며, 여러 사건이 뒤엉켜, 한눈에 사태를 명확하게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 민족 자체의 부르주아 혁명사는 꼭 밝혀내야 할 부문이다. 갑오농민전쟁, 의병운동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민중항쟁은 많았지만, 당시 가장 절박했던 자주적 근대화를 향한 우리 민족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 개화파의 활동은 일본의 <조일수호조약의 개정> 노력부터 

 

개화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이미 외세의 경제침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1876년 7월 일본이 함대를 앞세워 강압적으로 맺은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길을 열어놓은 조약이다. 

이 조약에 대해서 우리 사가들은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이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불평등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일본의 대조선 경제침략을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날강도 같은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의 경제를 보호하는 문항은 하나도 없고, 개항장에서 일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을 허용하는 등 일본을 위하여 조선이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만 규정되어 있었다. 또 조선의 물산을 수탈하는 일본의 상선들은 최저 혹은 무비용으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일본 상품도 무관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농산물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었으며, 반대로 일본 상품은 아직 개항하지 않은 곳까지 운송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876년 개항 직전의 부산항 [사진 : 필자제공]

이 조약에 의하여 강요된 부산항 개항은 나라의 근대화를 도모하려고 개국외교를 지향한 개화파의 기대와는 달리 조선을 외국 자본주의 상품의 판매시장으로 전락시키고 민족산업의 발전을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자본주의 상품은 홍수처럼 밀려들었고, 쌀과 콩 등 농산물과 금, 은, 동 등 귀금속이 대량 흘러나갔다. 관세정책을 하루빨리 실시하여 국내시장을 보호하고 나라의 경제가 혼란 상태에 빠져드는 것을 막는 것이 시급했다. 이처럼 경제에서 혼란이 조성되자 1878년 9월 조선은 수출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였으나 일본의 군사 외교적 압력에 굴복하여 곧 취소하고 말았다. 
                      
개화파는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경제뿐 아니라 정치적 자주권을 고수하는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로 보고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그들은 각국의 관세 제도 자료들을 수집 연구하는 한편 김홍집 등을 통하여 관세 갱신을 시도하였다. 

1880년 7월 김홍집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수출입품 관세협정> 체결을 제기하였다. 1881년 2월부터 김홍집과 일본 하나부사 사이에 32개 조의 조약 수정안(조선 측이 작성함)에 대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수정안은 개항장에서 토지 및 건축물들을 조차할 때의 준수사항과 일체 선박들의 수송, 관세 납부, 상품 반입·반출에 대한 통상문제, 개항장 등에서 외국 화폐의 사용 절차, 국법에 위반되는 물품의 반입·반출을 엄금하는 문제, 개항장 등에서 외국인의 활동지역 제한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1876년 조인한 <조일수호조규 부록> 11조에 의거하여 제기한 정당한 개정요구였으나, 일본은 조선 대표의 자격을 문제 삼아 회담을 결렬시키는 바람에, 이듬해 고병호가 3차 수신사로 파견되어 통상조약 교섭을 진행하였다. 여기에는 거류지의 땅세와 선박세의 대폭 인상, 개항장에서의 외국인에 대한 처벌규칙의 강화, 쌀·밀·콩의 수출금지, 홍삼의 수출금지, 수출입세의 인상을 3개월 이전에 예고하기만 하면 언제나 시행할 수 있게 할 것, 아편과 가톨릭교 관계 도서의 수입금지, 선박 선원의 죄에 대한 처벌 등이 있었다. 유럽의 술과 일본의 술은 35%, 시계 및 유럽산 사치품은 25%, 일반상품은 19%의 관세를 부과하며 수출품은 종류를 불문하고 5%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하였다. 

 

비록 이 담판도 결렬되었으나 일본은 결국 관세협정 개정안에 동의해 나오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1883년 6월 <조일통상장성속약>에서 무관세제도를 일부 수정하게 된다. 즉 42개조로 된 해관 세칙에서는 약재 및 식료 일용잡화, 가구류 등의 관세율은 5%, 유럽 술, 시계, 장식품 보석류는 25%~30%, 일반상품은 8~10%로 규정되었다. 

 

개화파는 일본이 압박하던 ‘추가 조기 개항장 개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1876년에 부산항, 1880년 4월 원산항을 개항한 일본은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인천항을 개항시키려고 끈질기게 조선을 압박하였다. 그 이유는 인천항은 일본으로서는 조선 침략을 확대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목표였으며, 반면에 조선으로서는 수도방위와 연관된 사활적인 문제였다. 

개항기의 제물포 사진 [사진 : 필자제공]
 

이즈음 이유원, 이최응 등 조선의 수구 집권세력은 오히려 외세를 끌어들여서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청나라의 이홍장과 결탁하여 유럽과 미국에게 문을 열어줄 음모를 본격적으로 추진시키고 있었다. 

개화파는 나라의 예속화를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긴급한 문제로 제기하였다. 그것을 위하여 첫째, 자본주의 나라들과 통상할 수 있는 자체의 준비를 앞세우는 기초 위에서 개항 통상을 발전시킬 것을 당면 과업으로 제기하였다. 즉 일본의 인천항을 개항하라는 요구를 연기시키고 관련한 준비부터 갖추려는 계획을 세웠다.       

① 인천항의 개항을 일찍 실현하는 것을 반대할 것
② 기선 여러 척을 사들여 삼남으로부터 서울에 쌀을 날라오는 일에 만전을 기할 것 
③ 국방을 보강하고 신식대포, 총 포함을 구입할 것 
④ 개화파 성원 3~4명을 일본에 파견하고, 견문과 시찰에 기초하여 장차 국가정치에서 주동적 역할을 할 사람들이 방향을 정할 수 있게 할 것 
⑤ 이 사업에 대한 재정을 보장하기 위하여 돈많은 사람들로써 회사를 창립하며 회사가 재주가 되어 외채를 얻을 것 <일본외교문서>

 일본은 조선이 인천 개항에 동의하지 않자 1879년 5월, 인천항의 개항논의를 앞으로 20개월간 더 연기하기로 하고 그동안 다른 개항장이 없으면 다시 인천항을 개항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조선은 다시 이를 거부하면서 역제안을 내놓았다. 

① 일본 측이 내놓은 인천항 개항 20개월 안을 7개년으로 할 것 
② 7년 동안 일본이 개항장을 찾지 못하면 남양부나 교동부를 개항장의 후보지로 할 것

담판은 다시 결렬되고 1880년 12월 김홍집은 일본에 인천항의 개항 날짜를 5년간 연장하자는 것과 함께 부산과 원산에서 곡식의 해외유출을 방지하는 <방곡령>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강경한 자세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예속화 정책을 집요하게 추구해온 일본에게 인천항 개항의 조기실현을 달성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집요한 정치 군사적 압력으로 인천항은 1883년 개항하게 된다. 일본은 임오군란에 인적 물적 피해를 날조하면서 1882년 7월 17일 <제물포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은 병력 동원비 50만 원과 <피해자 위자료> 5만 원을 합하여 55만 원의 배상금을 받아내기로 하였으며 공사관 경비라는 구실로 2개 중대 400명의 군대를 서울에 상시 주둔시키게 되었다. 

 

<제물포조약>은 참을 수 없는 강도적인 것이었다. 제멋대로 군대를 출동시켜놓고, 50만 원이라는 거액을 조선에게 <배상>하게 한 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재정 형편으로 볼 때 매해 10만 원 씩 5년 동안에 50만 원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 뒤이어 <조일수호조규 속약>을 체결하여, 양화진을 새로 개항하고 부산, 원산, 인천의 각 항구에서 사방 50리씩, 만 2년이 지난 후에는 다시 100리씩 자유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 1883년 1월에는 부산과 나가사키 사이의 해저전신선 부설권을 강요하였으며, 1883년 6월에는 42개 조목에 대한조일통상규정과 해관세칙을 강요하여 조선 각지에서 상업 및 무역 활동이라는 명목의 경제침략을 강화하였다.

 

인천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탈되는 쌀 [사진 : 필자제공]

개화파들은 아직 조선의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집권세력이 아니었고, 군사력도 갖지 못한 조건에서 다른 나라의 사례와 외교만으로 일본의 정치 군사적 강압을 물리칠 힘을 갖지 못하였다. 국내 정치에서의 개혁도 마찬가지이지만, 외교 분야에서의 개화파들의 노력은 그들의 애타는 심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서양 열강의 조선침략을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파들은 외교 조항 하나라도 개선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고 백성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갖는 노력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