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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목멱산(남산)에서 114년 전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조선)를 보다

주권자전국회의 2024. 7. 4. 14:05

<답사기>목면산(남산)에서 114년 전의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조선)를 보다

 

 

직접민주주의 뉴스 기자 구광숙

 

 

629일 토요일 오전 10, 3·1민회 회원들이 목멱산(남산) 안중근 기념관(기념관) 앞에서 모여 조선신궁터, 왜성대터, 경성신사터, 통감부터 등을 둘러보았다.

 

기념관에 오전 950분까지 집결하라고 하여 집에서 서둘러 나와 서울역에 9시 도착하여 숭례문 방향 쪽으로 안중근 기념관까지 걸어가니 50분 정도 걸렸다. 네이버에서는 서울역에서 걸어서 30분 정도라 나와 있었으나 시간은 좀 더 걸렸다. 천천히 걸어서 그런가 보다. 도착하니 다른 모임들에서도 많이 와 있었다. 오늘 같이할 일행들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웬 청년이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제식민지의 잔재를 걷다일행이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고, 내가 다가가 그 모임의 일행이라고 하고, 청년과 함께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안중근 기념관 앞에서 3·1민회 회원들이 개항기부터 일본식민지 시대의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이야기가 있는 서울 길저자 최연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면서 걸었다. 이야기를 같이 듣던 회원들이 최연 선생님이 꼭 당시의 사람처럼 설명이 생생하다고 말하였다.

 

처음부터 해설사는 남산이라 하지 않고 목멱산이라고 불렀다. 남산의 옛 이름이다. 안중근 기념관 앞에 조선신궁이 있었다. 조선신궁은 터가 보존되어 있고 눈에 띄어서 찾기가 쉽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때 조선신사는 전국에 걸쳐 있었으나 신궁은 목멱산에 하나 있었다. 일본에 하나, 조선에 하나 이렇게 있었다. 관폐대사로 역대 일본천황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신궁을 식민지 조선에 지었다는 것은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만들 때 첫째, 종교 둘째, 교육 셋째, 군대를 들여서 지배하는데, 일본제국주의도 이와 똑같은 수순 이었다고 한다. 일본신궁 조금 위쪽에 나라의 안녕을 빌었던 국사당이 있었는데 조선신궁에 참배할 때 꼭 국사당에 참배하는 모습이라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겼다. 목면산의 동쪽으로는 일본 군부대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왜성대와 조선총독부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1907년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사용하다가 1926년에 경복궁 흥례문을 철거하고 청사를 신축하였다.

 

일본 군부대는 해방 이후 미군 군부대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 이전에는 청나라 군부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조선신궁의 남쪽 계단이 있는데, 지금은 주변 개발로 일부분만 남아있다. 남아있는 계단의 3배 정도가 되는 넒은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상상해 보니 계단의 규모가 대단하다. 신궁 참배할 때 그 넓은 계단에 열을 맞추어 올라와서 참배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신궁의 서쪽 계단은 당시의 계단 그대로라고 한다. 단지 계단의 석상만 없다고 한다. 참배하러 올라왔던 계단들이다.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면 왜성대터가 나온다. 지금은 남산 돈까스가게들이 있는 곳이다. 왜성대터는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다. 내려오면서 이곳에 돈까스 가게들이 많은 이유가 혹시 왜성대터라서 그런가 하고 우스개스러운 이야기를 참여한 사람들과 나누었다. 쭉 내려오면 대한적십자사가 있다. 그 건물은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중정) 별관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중정 본부는 현재 남산 유스호스텔 건물이다. 중앙정보부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간첩조작사건으로 엮으면서 고문 등으로 수사를 하였던 곳이다.

 

일본 거주민들이 늘어나자 한양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8년 조선총독부가 그곳에 조선신궁을 건설하면서 폐쇄하였다. 목멱산에서 왜성대 내려오는 길, 남산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한양공원표지석이 있다. 이 공원의 개원식이 경술국치를 딱 석 달 앞둔 1910529일이다.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큰 글자는 고종황제의 어필이다.

 

다음으로 경성신사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현재 리라초등학교 근처이면서 숭의여대 자리이다. 처음에는 남산대신궁이란 이름으로 만들었으나 1913년에 경성신사로 바꿨다. 경성신사터를 지나 리라초등학교 안에 있는 노기신사터로 갔다. ‘노기신사터는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이다. 노기 마레스케는 군인이면서 교육자였고, 황족교육을 담당하는 학습원의 원장으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의 교육을 맡았다.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마레스케는 부인과 함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다. 이처럼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기리는 노기신사였다. 노기신사의 모습은 현재 사진과 몇 개의 유물 정도만 남아있다.

 

리라초등학교 내에 있는 겅성신사터에서 최연 이사장이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통감부터로 갔다. 통감관저터의 비석에는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8223대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숙국치의 현장이다고 새겨져 있다.

 

일본과 한일병합 조약을 맺기 몇 시간 전 창덕궁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에서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등 8명 친일파 대신은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였다. 이때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가 국새를 치마 밑에 숨겨서 대신들이 황후의 치마를 들칠 수 없어 국새를 뺏을 수 없었다. 그때 윤덕영은 순정효황후의 백부라는 친족을 내세워 황후를 겁박하고, 치마를 들춰서 국새를 빼앗았다. 윤덕영은 이 공로로 훈1등 자작으로 합방 은사금 5만엔을 받았으며, 이왕직찬시(李王職贊侍)가 되었고 곧 장시사장(掌侍司長)이 되었다.

 

윤덕영 외의 7명도 한일병합조약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조선귀족작위를 수여 받았다. 이 통감관저에 1907년에 일본 황태자가 들렀다고 한다. 황태자의 방문은 한일병합 이전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화 정책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감관저 터 옆에 기억의 터로 가는 길이 있고, ‘기억의 터에는 대지의 눈이 있었다.

 

이 기억의 터는 2016년에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잊지말고, 위안부로 끌려갔던 분들을 기억하고, 조금이나마 위로를 하기 위해 성함을 새겨 놓았으나 작년 20239월에 이 작품을 설치한 임옥상 예술가의 2013년 직원 강제추행 사실을 들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작가의 작품을 유지·보존하는 것이 공공미술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서울시장 오세훈은 ‘대지의 눈’을 철거하였다.

 

거꾸로 세운 동상

 

정의기억연대 등은 기억의 터 건립추진위원회를 비롯해 2000명이 넘는 시민과 단체가 성급한 철거 전에 임옥상의 성폭력과 일본군 위안부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공론의 장을 통해 먼저 마련하자고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했다.

 

목멱산에서 내려와 숭례문 쪽으로 향했다. 해설사 선생님이 우리나라 전통적인 길과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때의 길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우리나라는 먼저 사람이 사는 집을 짓고 남은 터에 길을 내었는데, 일본은 도로를 널찍하게 먼저 내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작로가 넓고 죽 뻗었고, 우리의 전통 길은 구불구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지식이 얕아서 선생님이 물어보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답을 잘 할 수 없었지만, 좋았다. 역사를 현재 살고있는 장소에서부터 들여다보니 내 머리 속에 과거와 현재가 가득 들어차 있는 느낌이었다. 멋있는 역사 해설가 선생님과 3·1민회회원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즐겁고 소중하다. 해설을 들으면서 목멱산(남산)’ 이름과 언제부터 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목멱산은 원래의 남산 이름이다. 조선초기 1395(태조 4)에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지금의 남산 팔각정 자리에 목멱신사를 지었다. 목멱신사를 국사당이라고 하였다. 목멱신사 즉 국사당에서는 나라를 지키고 복을 비는 수호기복, 왕가나 왕손의 병을 구원하자는 구병 등이 주를 이루었다. 목멱산은 경복궁 앞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불렀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대 때 조선신궁을 짓고 남산을 성역화하기 시작하여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기고 남산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