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선 부르조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5)
- 청.일 관계와 국내수구세력의 동향에 대한 대응
1.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을 견제하여 조선에 대한 예속을 강화하려는 청나라
우리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크다 보니 1880년대 조선에서 벌린 청나라의 만행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외세는 집권세력인 민비 일족과 결탁한 청나라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사대관계를 악용해 조선을 예속화하려고 했다.
이렇게 청나라의 대국주의적 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개화파들은 청나라와 전근대적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조-청 관계를 근대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881년 10월 어윤중이 천진에서 이홍장과 만났을 때, 조선-청국 관계를 근대 국제법적 규범에 기초하는 외교통상 관계로 재조정하자고 제기했다. 이를 위해 이미 의의가 없는 회령시장을 철폐하며, 년공사, 하사사, 진주사 등의 사절파견을 모두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서둘러 3000여 명의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했다. 그리고 병력을 서울에 계속 주둔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했다. 청나라 제독인 오장경은 원세개와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내세워 조선의 군사, 외교 및 재정을 일상적으로 감독하기 시작했다.
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예속화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역사적으로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던 <종주권>을 들고나왔다. 서양 열강이 일본을 앞세워 중국을 먹어보려는 것을 문밖에서 막아 자체보위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청이 조선의 실질적인 지배자임을 국제사회에 공표하여 <아편전쟁>으로 실추된 중국의 위신을 회복하자는 야욕도 있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에서 군사적 시위를 요란하게 하면서도 일본과 군사적 정면 대결을 바라지는 않았다. 사실 그들에게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일본의 힘을 축소해 청의 우위를 보장하는 것(조선에서 ‘청나라 우위의 청-일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임오군란과 동시에 군대를 파견한 청나라의 목적이었다. 대원군이 대일 강경정책을 불사하게 되면, 일-청 군사대결이 격화되어 자신들이 난처한 상황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사전에 뇌관을 제거하려고 대원군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아예 대원군을 먼저 제거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청나라가 주도하는 대일관계를 정착시키려 한 것이다.
청나라는 1882년 10월 17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무역, 상업활동에서 특수한 권리, 거주의 자유, 낮은 비율의 관세, 치외법권 등을 규정하였다. 또 ≪조선-봉천 변방인들간의 무역규칙≫, ≪인천 항구의 청국상인들의 거주지역 경계에 관한 규정≫,≪조선-길림 상인들 간의 무역규칙≫등으로 조선에 대한 경제침략에서 일본의 우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한사코 거부하던 ≪조-미수호조약≫의 강압적 체결을 중개하여 미국의 조선 경제침략의 문을 열어주고 조선에 대한 청의 지배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려 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비 일족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통치권을 유지하는 한편, 백성에 대한 수탈을 전례 없이 강화하였다. 임오군란으로 피신했던 민비는 왕궁으로 돌아온 후 무당과 점쟁이를 끌어들여 굿과 불공으로 세월을 보냈다. 왕실의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부패로 나라의 규율은 무너져 내리고, 국가재정이 엉망이 되었다. 그들은 거덜 난 재정을 메꾸기 위하여 ‘당오전’이라는 화폐를 주조하여 강제통용시키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영락해졌다. 또 부패한 권력에 기생하던 고위층의 협잡 행위로 인하여 세금을 내지 않는 땅은 많아져, 국가의 재정 수입은 고갈되었고 외국군 주둔비, 배상금 지불 등 추가 재정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2.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 전술과 이에 대한 서양 열강의 입장
일본은 청나라의 조선 침략을 보면서 청나라에 못지않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는 1882년 10월 일본의 참의 이또 히로부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기하였다.
첫째, 관계 열강과 협력하여 조선의 독립을 승인시킬 것
둘째, 청-조선 종속문제에 관해서는 청국과 직접 교섭할 것
셋째, 조선의 혁신파(개화파)에게 원조를 주어 자발적으로 독립의 열매를 맺게 할 것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
일본이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의 독립’은 조선의 자주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청나라에 붙어 있던 조선 집권자들을 청나라에서 떼어내 자기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당시 일본 집권세력들은 침략전쟁준비가 채 완성되지 않았다고 보고, 청나라와 전쟁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정면충돌이 아닌 외교적 방법으로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일본은 우선 비밀리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 침략에 대한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은 신미양요 실패 이후 조선을 직접 굴복시키기 조련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가 일본을 내세워 보자는 것이었다. 미국을 일본을 앞세워 자신들의 조선 진출과 이권 확보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그래서 일본의 조선 침략정책을 뒤에서 후원하고 지원했다. 또 영국은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제압하려고 일본 편에 붙었다.
3. 개화파의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전략
이처럼 당시 적대하는 두 침략 세력인 일본과 청나라는 경쟁적으로 조선을 예속화시키려 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독립과 원조로 위장했다. 개화파들은 이것을 전술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양 세력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잘 활용해 나라의 정세를 일시적으로나마 안정시키고, 그 틈을 이용해 개혁수행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부패한 집권세력의 무책임과 무능력으로 나라의 위기가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교적 수단을 잘 활용해 자주권을 지키고, 개혁을 지체없이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대응책이라고 봤다. 그래서 청·일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그들의 속셈을 역이용한 외교전을 추구했다. 이 과정은 부패 타락한 조선 집권층과의 치열한 투쟁을 동반하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당시 대원군 납치사건을 참을 수 없는 주권침해 행위이며, 난폭한 내정간섭 행위로 보고, 그 문제를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원군 납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해 풀면서, 이와 함께 근대적 외교통상 관계를 확립하고, 미해결로 남아 있는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을 제기하기로 했다. 조선 정부는 1882년 8월 사은사 및 진주사의 명칭으로 조녕하를 정사로 하고, 개화파 지지자인 김홍집을 부사로 하는 대표단을, 어윤중을 문후사로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조녕하는 개화파는 아니었지만, 자주외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집권세력이 움직여야 했으므로 정사로 하여 개화파가 결합하는 것이 적절한 방안이었다.
그들은 납치해간 대원군을 곧 조선에 돌려보낼 것을 중요한 안건으로 제기하였다. 대원군은 누구보다도 개화를 반대하는 수구 정치인의 대명사였지만, 개화파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청나라의 대원군 납치야말로 가장 난폭한 조선의 자주권 유린이라는 판단하에 대원군의 귀국을 간절히 원하며 민족적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대원군을 조만간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홍집, 어윤중 등의 조청관계를 종전의 봉건적이며 불평등적인 사대 외교 관계에서 근대적인 외교통상 관계로 갱신하려는 노력은 1882년 10월에 맺은 ≪조청상인들간의 수륙무역에 관한 조약≫으로 나타난다. 당시 청나라는 조-청관계를 근대적 관계로 갱신하는 데는 관심이 없이 오직,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고 청나라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전의 사대외교관계를 ‘실제적인 종속관계’로 바꾸고 싶었지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명분으로 ‘조선에 대한 <우대> <평등>과 <호혜>의 구호’를 들고나온 이상 일본처럼 무관세, 치외법권 등과 같은 가혹한 조건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김홍집, 어윤중 등 혁신 관료들이 당시 청·일간의 모순을 이용하여 조-청 관계를 불평등적이며 예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무적 관계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 청나라와의 조약은 이후 조선에서 일본과의 조약에서 무관세 조항을 일부 개정하는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이 개화파들에게 개화를 돕겠다는 추파를 던지면서 청을 견제하고 조선 침략의 길을 닦는 것을 대조선 정책의 하나로 삼고 있던 조건에서 조선이 청나라와 맺은 다소 합리적인 조약의 사례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임오군란 이후의 정세에서 개화파의 전술
1882년 7월 25일 개화파들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되었으며, 김옥균 일행도 동행하였다. 사절단은 1882년 8월 14일 일본 고베에 도착한 이후 3개월 이상 일본에서의 근대화의 성과들을 시찰하는 한편, 일본의 정계와 사회계 인사들 그리고 일본 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접촉하면서 첨예화된 조-일 관계를 조정하고 조선에서의 부르주아 개혁수행에 일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히 벌려 나갔다. 특히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요원들은 1883년 3월까지 일본에 머무르면서 일본이 개화파들에게 표방한 <원조>의 실현을 위하여 각 방면으로 활동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옥균은 일본 체류 기간 일본의 <호의>를 최대한 이용하여 17만 원의 차관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당시는 민가 세도 집단의 탐욕과 부패로 인하여 국고가 말라 버려 개혁자금을 마련하는 문제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조선 정부에게는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 침략자들에게 배상해주기로 한 돈을 지불할 능력도 없었다. 일본은 부르주아 개혁 자금으로 쓰려는 개화파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도 만일 차관을 제 때에 변상하지 못하면, 새로운 경제적 이권을 탈취하려는 미끼로 차관을 제공하였다. 당시 청나라가 민가 일족에게 50만 원의 차관을 제공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권을 억누르려 하는 정황도 조선에 차관을 주게 된 배경이었다.
물론 일본의 <차관>에 대한 조건은 가혹한 것이었다. 부산 세관의 수입금과 단천 금광에서 채굴하는 금을 담보로 하여 연 8%의 이자와 2년 후부터 10년간 매해 원금 1만 4000원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개화파는 가혹한 조건의 차관이었지만 당장 일본에 갚아야 할 배상금, 또 부르주아 개혁을 위한 자금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17만 원 중 5만 원은 <제물포조약>에 의하여 규정된 <배상금>의 제1차 지불액으로 선 공제하고 12만 원은 개화파들이 부르주아 개혁자금으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이후 극도로 높아진 국제 관계의 긴장 속에서 청·일간의 정치적 대립을 완화하고 부르주아 개혁 추진에 유리한 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임오군란 직후 일시적으로 정권을 잡았던 대원군은 중국에 납치되기 전 그 짧은 기간에 개혁의 중심기구였던 ≪통리기무아문≫을 해산하는 등 그동안 근근이 이루어왔던 개혁의 성과마저 무로 돌려놓은 상태였다. 조선의 개혁은 일본과 청나라, 또 봉건왕조 중심의 체제안정을 도모하려는 수구세력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한발씩 전진되어 나가야만 했다. 다음번에는 임오군란 이전 개화파가 추진하였던 활동을 소개하고 그 다음번 연재에 임오군란 이후 다시 시작하는 개혁사업에 대하여 정리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