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 오후 2시, 서울글로벌센터 9층에서 약산 김원봉을 기리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약칭 김원봉과 함께)’ 창립총회가 열렸다. 김원봉과 함께’는 시민사회, 학계, 출판계, 종교계를 망라한 원로인사를 포함한 6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지난 5월 16일 1차 회의를 시작으로 10월 27일 발기인대회를 마친 후 이날 출범했다. 총회날인 11월 10일은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 창립일(1919.11.10.)이기도 하다.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비타협적 투쟁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광복 후 ‘신조선 건설’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백범 김구와 쌍벽을 이룬 민족지도자였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고착화하면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김원봉은 친일파가 득세한 남한에서 쫓겨나듯 월북해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으나 숙청당했고, ‘김원봉’ 이름 석 자는 남북 양쪽에서 금기어가 되었다.
아래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선언문 전문.
‘약산 김원봉과 함께’ 창립선언문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한다. 신채호 선생은 이 말을 더 구체화해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라는 엄혹한 상황에서도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한 것이다. 2022년 현재 한반도 안팎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이 말의 의미를 새삼 일깨운다.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쫓기듯이 사는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만 바라볼 뿐 역사를 아예 외면하거나 선택적으로만 기억하려고 한다. 역사는 단지 지나간 옛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근‧현대사의 경우는 더 그렇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서 알수 있듯이 근‧현대사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근대 이후 우리가 겪은 일련의 변화(일제강점과 독립운동, 해방, 분단, 민족상잔, 민주화와 산업화 등)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의 격변이었다.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해방은 외세의 개입 때문에 분단으로 직결되었고 다시 분단은 민족상잔의 전쟁과 독재체제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벌여 나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억압과 차별, 독재와 민족분열의 망령이 사라지고 대신에 자유, 평등, 민주, 평화의 물결이 넘쳐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오늘 ‘김원봉과 함께’의 출범을 선언한다.
김원봉 선생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뒤 우리 민족이 겪었던 비극을 상징한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벌일 때는 김구 선생과 비견될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남북 모두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고향인 밀양에서 뒤늦게 기리는 일이 시작되었지만 더 퍼지지는 못하던 가운데 2015년부터 선생의 활동을 다룬 몇 편의 영화가 공개되고 또 관객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김원봉’이름을 알고 선생의 행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반세기만에 역사적으로는 복권된 것이다.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우리는 남북이 증오와 대립의 시대를 넘어 평화공존의 시대로, 그리고 다시 민족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선생을 더 제대로 기억하고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다시 살릴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오늘 ‘김원봉과 함께’를 외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의 오늘 만주의 지린성(吉林省)에서는 민족혁명 단체 (조선)의열단이 출범했다. ‘의열’은 ‘하늘 아래 정의로운 일을 맹렬하게 실행한다’는 것을 뜻했다. 여기서 ‘정의로운 일’은 바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었다. ‘의열’은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의열단의 창립을 주도한 것이 ‘밀양 사람’ 김원봉 선생이었다. 선생은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의 경력을 쌓아나갔는데 그 핵심은 ‘통합’과 ‘혁명’의 두 마디로 정리될 수 있다. 선생은 1925년에 국내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며 사회운동자가 곧 민족운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념의 대립을 뛰어넘어 독립을 위한 전선에 손을 맞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글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선생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조선)민족혁명당 창당, 대한민국임시정부 합류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 노선의 합치와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에 온힘을 쏟았다.
선생의 의뢰로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1923)에는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혁명으로만 가능하며,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바”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라고 명시했다. 곧 독립운동은 민중이 주체가 된 민족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혁명선언’ 이후 선생은 민족혁명가로서의 일관된 삶을 살았다. 1935년 선생의 주도 아래 민족통일전선의 하나로 출범한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의는 “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에 기초를 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평등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당강은 더 구체적이어서 “1. 구적(仇敵) 일본의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완성한다, 2. 봉건세력과 일체 반혁명세력을 숙청하고 민주집권의 정권을 수립한다, 3. 소수인이 다수인을 박삭하는 경제제도를 소멸하여 국민생활상 평등의 제도를 확립한다” 등으로 되어 있었다. 선생이 생각한 민족혁명의 요체는 ‘자주독립, 민주, 평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관은 단지 선생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때는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싸고 반목을 보이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선생은 1939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선생과 함께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발표할 수 있었다. 이 공개서간의 내용은 민족혁명당의 당의‧당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생의 민족혁명론은 그만큼 시대의 흐름에 맞는 것이었고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공감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선생은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고 한국광복군 부사령을 맡은 데 이어 국무위원(군무부장)까지 맡았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네 영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은 선생에게 큰 아픔을 가져왔다. 1945년은 해방의 해이자 동시에 분단의 해이기도 했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곧 분단이 이루어졌다. 분단 직후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냉전체제는 분단을 고착화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분단을 극복하고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지만,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별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분단으로 자주독립의 민주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선생의 꿈은 갈가리 찢어졌다. 아니 선생의 이름 석 자가 남북 모두에서 사실상 지워지게 했다. 그런 세월이 벌써 반세기를 훌쩍 지났다. 대한민국에서 선생의 이름이 금기가 된 지는 70년이나 지났다.
우리는 선생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려고 한다. 망각의 시간이 너무 길기에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더라도 일제강점기에 선생이 꿈꾸었던 민족혁명의 정신을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공존과 민족통합의 밑거름으로 삼을 것이다. 오직 민족을 위한 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고 했던 선생의 삶이 올바로 재평가되어 ‘밀양 사람’ 김원봉이 아니라 ‘한민족’의 김원봉으로 기억될 수 있을 때까지 ‘김원봉과 함께’는 선생과 함께할 것이다.
2022년 11월 10일
‘약산 김원봉과 함께’ 발기인 일동
출처 : 직접민주주의 뉴스(http://www.ddnews.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