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드디어 거사를 감행하다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조선 부르주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10)
1. 마침내 새날을 열 거사를 감행하다
10월 17일 낙성식이 거행될 우정국 청사에는 미국공사 후트, 서기관 스커더, 영국영사 아스톤, 청국영사 진수당, 서기관 담갱요, 일본공사 서기관 시마무라, 묄렌돌프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김옥균, 서광범, 민병석, 윤치호, 신락균 외 친군영 지휘관(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등 18명이 참가하였다.
김옥균은 이날 오후 4시에 우정국으로 가서 홍영식과 함께 정변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집에 돌아오니 고종시위 변수가 와서 ‘국왕께서는 오후 2시쯤에 취침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전날 변수는 김옥균의 지시대로 상소와 보고서들을 무더기로 올려 국왕은 전날 밤은 물론 당일 날 오후 4시 정도까지 잠을 잘 수 없도록 만든 계획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고한 것이다.
김옥균은 이웃 서재필의 집에서 대기하던 정변의 장사들에게 별궁을 방화하라는 행동 지침을 내리고, 우정국 술자리에 참석하였다. 원래 8시 예정이었던 방화가 계속 늦어지면서 결국, 별궁에 불을 지르는 것은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김옥균은 즉각 우정국 근처 초가집에 불을 지를 것을 지시한다.
이윽고 밖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혼란이 벌어졌다. 한규직이 화재현장에 나가봐야겠다면서 일어서는데 밖에 나갔던 민영익이 행동대원의 칼에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연회장에 뛰어들었다. 연회장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였고, ‘불을 끄러 나오는 수구파들을 처단하려던’ 원래의 정변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북쪽 창문을 뛰어 넘어 달려가다가, 이인종과 서재필에게 개화파 장수달을 인솔하여 경우궁 문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간다. 별궁방화 실패 여파로 혹시 일본이 변심했을지 몰라 동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일본이 변심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김옥균은 편전으로 들어가 국왕을 깨우고, 지금 청나라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민가를 방화하고, 사람들을 죽이는데 국왕도 자리를 피하여 경우궁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때 미리 계획한 대로 사관학교 학생들과 궁녀들이 통명문 앞에서 화약을 터드려 폭음소리까지 요란하게 울리자 몸을 피하는 고종 부부에게 ‘일본군사를 요청해서 폐하를 호위하도록 하면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왕은 김옥균의 요청대로 일본 공사에게 자신을 호위하라는 친필 칙서를 박영효에게 주어 다께조에에게 전하게 하였다.
고종이 경우궁 정전 뜰에 이르렀을 때, 곧 박영효와 다께조에가 일본군을 인솔하고 와서 국왕에 대한 3중 4중의 철통같은 호위체제가 편성되었다. 이때 수구파인 경기 관찰사 심상훈과 왕궁의 숙직이었던 후영사 윤태준이 동행하였고, 한규직, 이조연이 경우궁으로 피신하여왔다.
김옥균은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에게 궁궐방위의 임무를 다하라고 추궁하면서 궁문 밖으로 쫒아내고, 문밖에서 이 세영사를 처단함으로써, 수구파의 반혁명적 무력은 지휘관을 잃은 오합지졸로 되고 말았다. 또 개화파들은 민태호, 민영목, 조녕하 등을 국왕의 이름으로 불러들이고 오는 도중에 모두 처단해 버렸다. 이렇게 개화파의 집권과 새로운 세상 건설을 막을 수 있는 수구세력의 거두들은 대략 제거됨으로써 개화파의 뜻을 펼칠 정변은 일단 성공한 듯이 보였다.
정변에서 승리한 개화파들 앞에는 새로운 근대적 정권의 수립, 새 정권을 공간으로 한 산업혁명 추진, 자금 해결, 정권의 국제적 지위 강화 등 헤아릴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개혁을 단행할 초보적인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국왕과 민비가 청나라를 끌어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개화파들은 우선 핵심성원 10명으로서 국왕의 거처인 왕실의 경비를 담당 수행하게 하였으며, 경우궁 내부에서 윤경완의 지휘 밑에 50여 명의 전영 군졸들을 배치하고, 일본군 150명이 경우궁 바깥문을 경비하도록 하여 청나라군의 진입을 막았다.
2. 새로운 세상을 펼칠 인물들
정변이 승리한 다음날인 18일 <조보>로써 공포된 새 정부의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새 정부는 개화파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여기에 대원군 계열의 일부 성원들을 배합하였다. 그것은 당시 대원군이 청나라에 끌려가 있던 조건에서 대원군을 지지하던 세력이 민가 세도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 반동들의 청나라에 대한 사대 투항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 개화파의 사회 계급적 지반이 아직 미약하므로 그들과 연합하여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이기도 했다.
개화파들은 10월 18일 새 정부의 구성을 세상에 공포하는 동시에 변수를 통하여 각국 공사 및 영사들에게 새 정권의 수립을 알렸다. 10월 18일 미국공사 후트, 영국영사 사스톤이 독일영사 쨈브쉬가 새 정부를 공식 방문하였다. 원래 조선에서 부르주아 개혁을 방해해 왔던 서양 열강이 그들이 개화파 정부를 공식 방문하였다는 사실은 좋건 싫건 간에 객관적으로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립된 부르주아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