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평화적인 개혁이 아닌 (갑신)정변을 선택한 배경
조선 부르주아 개혁운동 역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9)
1. 1884년 긴박했던 한반도 정세
개화파는 수구파를 척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무장정변 준비에 들어간 것은 1884년 봄이었다. 왜 이 시기였을까? 임오군란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군사력을 몰고 들어온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여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존립까지 위기로 몰리고, 청나라와 결탁한 집권 수구세력의 부패는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집권 수구파들에게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던 개화파들의 애국적인 개혁 활동에 대한 경계심과 방해가 극에 달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적대시하고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청나라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었지 조선 자체로 부르주아 개혁을 통하여 선진문명국의 대열데 들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주재 미국공사 푸트의 말에서 이를 역력히 느낄수 있다. 그는 김옥균에게 “바라건데, 당신들은 나라를 위하여 나의 충고를 듣고 신중하기 바란다...... 잠깐 산천을 유람하든지 또는 상해나 나가사끼 같은 곳에 갔다가 수개월 후에 돌아와서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면서 노골적으로 개화파의 활동을 저지시키려 하였다.≪갑신일록≫
이러한 정치적 위기 속에서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 확대되고 있었다. 1883년 5월 경상도 동래에서, 8월에는 성주에서 수백 명이 참가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외에도 위정척사론자들의 상소, 개화를 주장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활발히 벌어져 수구파와 외세의 침략 확대에 타격을 주고 있었으며 <자주>와 <근대>의 절박성에 대한 시대적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다. 외세와 수구 집권파의 패악이 심각해지면 질수록 더욱더 개혁의 필요성이 절박해지는 정세였다.
게다가 이 무렵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과 프랑스 관계가 악화되자 한반도의 청나라 군사점령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84년 4월 청나라 군대 3,000명 중 절반인 1,500명이 베트남으로 철군하더니 7월에는 청-프 전쟁이 발발하였다. 또한 청-프 전에서 청나라가 계속 패전하고 청나라의 무능함이 세상이 드러나자 청나라를 하늘처럼 믿던 민비 수구파 안에서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청나라 군대의 원세개도 초조와 불안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외세와 조선 집권 수구파의 불안은 날로 커져만 갔다.
2. 개화파는 정변에 필요한 군사력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갑신정변이 개화파들이 젊은 혈기에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일본만 믿고 일으킨 모험주의였다면 무장력을 마련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김옥균과 개화파들은 ‘근대화’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자주국방’을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하고 준비하던 사람들로서, 실제 정변을 계획하기 이전에 이미 자체의 힘으로 군사력을 키우던 사람들이다.
개화파들은 4개의 흐름으로 정변을 위한 무력을 준비하였다. 첫째 박영효가 한성판윤에서 경기도 광주유수로 좌천되자, 광주유수가 수도 방위군을 양성할 수 있는 직책이라는 점을 역이용하여 500명의 군인을 모집, 근대화된 군대양성에 큰 성과를 얻었음은 앞의 절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수구파는 이마저 반격하여 1883년 10월 광주 군대를 어영청으로 이속시켜 박영효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11월 박영효를 광주유수에서 해임시킨다. 그러나 수구파가 관리하던 친군영 전영의 장교들은 개화파의 비밀결사인 충의계에 소속으로 이미 내심 개화파를 따르고 있었다. 둘째 개화파들은 1883년 4월 개화파들에게 추천을 받아 함경남병사가 된 윤응렬은 북청에서 약 500명의 근대적 군대를 양성하였다. 함경도 북청에서 개화당의 군대 500명이 창설되어 강력한 신식 군대로 성장하자, 수구파는 이것을 매우 위험시하여 견제하고 유생들을 시켜 윤응렬을 탄핵하는 상소운동까지 전개한다. 윤응렬은 개화파 윤치호의 부친으로, 개화파들의 적극적 노력에 의하여 이는 잘 해결되어, 이제 이 북청군대를 서울로 불러올릴 명분을 어떻게 마련하는가의 문제만 남게 되었다. 셋째, 김옥균이 일본 육군 호산학교(사관학교 창립 전 단계)에 파견해서 1년 6개월 정도 유학시킨 서재필 이하 14명의 사관 생도들이 있었다. 이 사관생도들은 김옥균은 일본에 건너갔을 때마다 매주 1회 회합을 가지면서 개화사상을 전달하고 결속을 다져온 자들이다. 넷째, 개화파의 비밀결사 ‘충의계’의 장사와 군인 장교들이다. ‘충의계’의 결사대원은 장사 30명과 친군영 전영군인 13명 등 43명이었다고 한다. ‘충의계’는 죽음을 각오한 철저한 비밀결사였다. 김옥균을 지도자로 한 개화파는 1883년 봄부터 정변의 무력준비로서 광주군대 500명(친군영 전영군대), 북청군대 500명, 사관생도 14명, 충의계 43명 등 약 1,050명의 개화당 무력을 양성해 두었다.
개화파는 갑신정변 직전 무력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1884년 6월 8일 일본에 유학시킨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을 귀국시켰다. 1884년 6월 19일에는 김옥균이 윤치호(윤응렬의 아들)를 불러 모의를 한후, 윤치호가 국왕에게 상주하여 국왕은 7월 27일 윤응렬을 총훈중군에 임명하여 친군영 전영 정영관의 직책을 주고 북청군대를 상번시키도록 인솔하여 상경할 것을 명령하였다. 윤응렬을 1884년 9월 5일 (양력 10월 23일) 서울에 도착하여 우선 친군영 전영에다 주둔시켰다. 국왕은 9월 10일에는 북청군대의 군사훈련을 친히 관람하고 그 씩씩함에 경탄을 마지 않았고, 윤응렬의 노고를 치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여 북청군대를 모두 돌려보내고 빼앗기 위한 반격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그들은 개화파를 지지하던 환관 윤재현을 포섭하여 고종에게 윤응렬의 국왕 암살 가능성까지 망상하여 모략 참소하자. 고종은 북청 군대 대부분을 북청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물론 북청 군대 전원이 전부 돌아간 것이 아니라 70명 정도는 남게 되었고 기타 신설 편입한 400여 명의 군대가 있었으므로 김옥균은 정변 시 대략 1000명의 무력을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갑신정변이 일본에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의 허구성
갑신정변을 처음 계획하고 결정하던 시기에 일본은 개화파에게 대단히 냉담하였다. 청프전쟁의 발발하자 일본은 입장을 뒤바꾸어 개화파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였다. 이처럼 일본이 갑자기 표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일본 내부의 정치적 지형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에서 국권파의 강압적 정책을 비판하고 의회 및 입헌 정치를 주장하던 소위 <자유민권운동>의 주역들은 청프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의 개화세력을 지지 연대하여, 청나라를 몰아내자며 일본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일본의 국권파는 자신들이 조선 개화파와의 관계를 먼저 선점하여 청나라를 몰아내고 일본의 조선 침략 발판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휴가 중이던 일본공사 다께조에를 시급히 조선으로 돌려보내면서 일본이 조선의 개혁을 지원해주겠다며 개화파를 장악하라고 지시한다.
1884년 9월 12일 일본공사 다께조에가 개화파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오자 김옥균은 일본을 정변 수행에 이용할 수 있을지 검토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을 정변에 이용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일 수 없었다. 그간 세차례의 일본 방문을 통하여 일본의 표리부동한 정책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던 김옥균은 다께조에와의 만남에서 “... 연악하고, 뒤바꾸기 쉬운 귀국 정부의 정책은 추후도 믿을만 하지 못하다.... 오늘 귀 공사의 말을 들어 보니 어떻게 된 일인가?”라며 의구심을 드러내자 다께조에는 “무릇 나라의 정책이란 때에 따라서 변하고, 정세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변명하였다. (≪김옥균전≫ 상, 일본 게이오 출판사)
김옥균은 여러 차례 다께조에와의 접촉을 통하여 일본 정부 차원에서 대조선 정책에 변동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들이 청나라를 몰아내는데 절박한 관심이 있으므로 정변 수행에 이용할 수 있다고 타산하였다. 9월 17일 김옥균은 정변에 일본군대를 동원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은 개화파로서의 외교적 성과였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믿을 수 없었던 김옥균은 개화파 자신의 힘으로 정변을 단행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기로 하였다. 김옥균은 이러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일본의 약속을 최대한 활용할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였다. 개화파는 다께조에에게 일본군을 인입하는 조건에 대해서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청군이 몰려올 것에 대비하여 일본군은 왕궁의 호위만을 담당할 뿐 수구파들을 쳐내는 정변 과정과 내정개혁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협조를 받으려 한 것은 일본공사관 호위병으로 조선에 와있는 일본군 150명과 약간의 자금이었다. 개화파는 정변에 일본군을 끌어들여 왕궁 호위를 맡게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 청나라가 국왕 호위 중인 일본군을 공격해서 청일전쟁을 일으킬 모험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이이제이 전술이었다.
다께조에는 김옥균에게 정변을 군사적으로 지원한다는 개별적인 약속을 하면서, 10월 20일에 인천항에 입항 정기우편선 편에 도착하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확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김옥균은 일본의 답변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자체 결심대로 정변 단행 날짜를 10월 17일로 결정한 뒤였기 때문이다. 또 다께조에가 지원해야 할 군사 150명이란 이미 조선에 와있는 군사들로 일본 정부의 답변이 도착하지 않아도 다께조에가 실행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김옥균은 일찌감치 거사일을 10월 17일로 정하고서도 일본으로 가는 우편선 천세환이 인천을 출항한 뒤인 16일에야 다께조에에게 거사일을 알려주었다.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회답이 오기 전에 자체적으로 거사를 완성할 계획이었다. 여기에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문제는 김옥균은 정변 결정은 개화파의 독자적 결정이며 일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개화파가 정변 단행을 결정한 것은 5월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7,8월에는 이미 확정된 상태였고, 일본공사 다께조에가 일본에 휴가 갔다가 서울에 온 것은 9월 12일이었다.
4. 개화파가 정변을 감행하기 위하여 반드시 선결해야 할 문제
개화파에게 정변을 준비하는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국왕인 고종의 전취 가능성에 관한 판단이었다. 고종이 개화파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는다면, 정변같이 급박한 사태에서 커다란 힘이 된다. 정부에서 숫적으로 열세인 개화파들에게 국왕의 협조는 역량관계를 바꿀만한 일이기도 했다. 또 개화파들이 추구했던 부르주아 개혁은 ‘입헌군주제’였으므로 개혁의 필연성을 고종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고종은 극심한 사대주의자였다. 그는 임오군란으로 일본군이 침략해 들어오자, 청나라에 의존하여 자기의 왕권을 유지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면서 내정간섭이 극렬해지자 이번에는 일본에 의존하여 청나라를 견제하려 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빌붙어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던 수구파들은 고종의 이러한 태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이렇게 되자 이제 고종은 개화파에 의존하여 수구파들의 전횡을 막아보려고 하게 된다. 중심이 없이 시세의 변동에 따라 움직이는 고종의 동요성은 개화파들에게 국왕을 전취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미 전부터 고종에게 개화의 필요성과 진보성을 교육해오던 개화파는 정변 시기가 가까워지고 국왕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해지자. 적극적으로 국왕을 정변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사업한다. 갑신정변 며칠 전인 1884년 10월 12일 김옥균은 국왕과 만나 청프전쟁과 청.일간의 대결 전망, 러시아의 극동 전략, 일본의 대조선정책, 긴박한 정세 등을 설명하고,
‘ “... 만야 그렇다면 조선은 청.일 전쟁의 마당이 될 것입니다. 무슨 모책으로 이것을 면하겠나이까......조정에는 간신들이 가득 차서 청나라와 결탁하여 그 주구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어찌 도리가 있겠나이까! 신의 말에는 생사가 달렸사오나 나라의 위망이 조석에 달린 이때 신의 일신의 안위는 돌아볼 틈이 없나이다” 폭포 같은 아룀이 여기에 이름에 곤전(민비)께서 “경의 말은 아마 나를 의심하는 듯하나, 일이 나라의 존망에 관계되는지라 나는 일개 부인으로써 어찌 대계를 그르치게 할까보냐. 경은 숨기지 마라” (나는 실과 허를 알 수 없다.) 국왕께서 가로되 “경의 마음을 내가 이미 아는 바이니, 무릇 국가의 큰일과 위급한 때를 당하여서는 모든 것을 경의 주모(籌謀;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한 계책이나 책략)에 일임할 터이니 경은 조금도 의심하지 말지어다”. 나는 아뢰되 “신으로서는 감히 당할 수 없사오나 오늘 이 방의 성교는 정녕 귀에 있사오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바라옵건데 폐하께서 친서의 밀칙((密勅)을 내려주시오며 신의 신상에 항상 모시겠습니다”≪갑신일록≫’
고종은 김옥균의 개혁의지에 지지를 표명하였고, 도장까지 찍은 밀칙(密勅)을 그에게 내주었다. 김옥균은 국왕으로부터 ‘친서의 밀칙’을 받아 몸에 지녔으므로 정변에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온 나라에 정변의 정당성을 국왕의 ‘밀칙’을 빌려 설득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애매한 국왕의 동의는 정변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로 되었다.
5. 행동계획의 최종정리
김옥균은 10월 초순 정변 거사 실행계획을 수립점검하였는데, 내용을 간단히 추려보자
①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청사 낙성실 연회일을 계기 정변을 단행할 것 (10월17일)
② 낙성식 연회에 외교단,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영익 등 군대 관련 인사들을 초대할것
③ 안국동 별궁에 불을 지를 것
④ 화재가 나면 현장에 달려가는 4영사를 우정국 밖에 행동대를 매복시켜 처단할 것
⑤ 창덕궁 금호문 밖에는 전영 교관 신복모가 교관과 군졸 14명을 인솔하여 매복시켰다가 별궁의 화재에 의한 문의차로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가 왕궁에 들어가는 것을 처단할 것
⑥ 창덕궁 숙위를 담당한 전영군사는 그날 밤 윤경완의 지휘 밑에 있으므로 내응할 것
⑦ 창덕궁 인정전 행랑 및 기차 여러곳에 폭약을 장치하며 폭음으로 위협할 것
⑧ 안국동 별궁의 방화와 함께 일본국 공사관으로부터 군졸 30명을 파견하여 금호문과 경우궁 사이의 거리를 경계근무 시킬 것
이것으로써 개화파는 구체적인 행동계획까지 작성완료하였으며 정변준비는 일단락지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거사비밀과 관련하여 정확한 정변 날자는 비밀에 붙였으며 정변 수행을 위한 긴장한 사업들을 조직하여 우리나라에서의 첫 부르주아 개혁- 갑신정변을 단행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